<!-by_daum->
60년대 말이던가 ?
권세 높던 술감독이 있었다.
농수로에서 물을 관리하던 "물감독"( 토지래량조합 위탁직)도 있었지만
물감독은 권세는 없었다.
경사지 농수로 돌을 떨어뜨려 굴러가는 것을 재미로 삼던 아이들이나 두려워했다.
그러나 술감독은 권세가 막강해 술감독이 동네에 뜨면 아연 긴장했다.
농사철이 오면 아랫목에 항아리 놓고 술밥을 쪄서 말리고 메주 풀어 넣어 샘물을
부어 홑이불로 감싸 안아 신주 모시듯 두면 막걸리 향이 방안에 가득해진다.
어머니가 막걸리가 잘 익어가나 이불을 벗겨 맛을 보시곤 하셨다.
당시에 간식거리라고는 여름철 떪은 덜 익은 감이나 겨울철 군고마 정도만 있지
점방에서 팔던 "비행기과자"를 맛보는 것은 어머니 몰래 쌀 반되 항아리에서
퍼가 점방에 주고 사먹는 것이 아니라면 과자 구경도 못하던 시절이다.
아니 이거 이야기가 옆길로 샌다.
다시 막걸리다.
어머니가 막걸리 익어가는 것을 확인하던 것처럼
어머니 일하러 들에 나가시면 손가락을 찍어 맛을 봤다.
달짝찌근에다 신맛이다.
이렇게 막걸리 맛을 이해하던 그해
앞집 동갑내기 풍만이 친구네가 모내기를 했다.
그날 나는 풍만이네 논가에서 풍만이랑 놀다가 풍만이 어머니가 같은 종씨라고
국민학교 2학년 꼬마인 내(남자)게 존대말을 하시면서
막걸리를 뚝배기 국그릇으로 한사발을 떠 주셨다.
나는 풍만이 친구랑 그 한 사발을 즉석에서 다 마셨다.
마시고 다섯 발자국도 떼기 전에 논둑이 땅에 있다 하늘에 떠 있다 하는
정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물론 논으로 엎어져 옷이 흙으로 범벅이 되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내게 별다른 말씀을 안하셨던 것 같다.
그 이후로 성인이 될 때까지 다시는 막걸리를 입에 대지 않았다.
또 다시 이야기가 옆길로 샛다.
다시 술감독 이야기다.
술감독이 동네를 돌아다닌 것은 농가에서 마음대로 막걸리를 담가 먹거나
소주를 내려 먹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세금 중에 최고가 술 세금 아니던가!!!!
그렇지만 막걸리를 농가에서 담가먹는 것은 전통문화가 아니었던가?
지금 시각으로 보면 막걸리를 사다 먹지 왜 담가 먹느냐고 할 것이다.
당시 농촌은 소득이 아주 낮았다.
그래서 중학교 진학률도 아주 낮았다.
지금 교교 졸업생이 100% 대학진학해도 될만큼 대학정원이 늘어난 것을 보면
60년대는 격세지감이다.
이렇게 낮은 소득이라 막걸리 도개(술도가)에서 막걸리를 사다 먹는 것도
부담스런 시절이었다.그래서 가정표 막걸리가 성행하고 사람이 많이 모이는
모내기철 같은 경우 술감독이 들로 돌아다니며 막걸리 술항아리가 있는지
감시하고 다녔다.
술감독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서 술독을 샛밥(새참)먹는 곳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숨겨놓고 밥 먹으며 한잔씩 하였다.
이런 가정표 막걸리도 70년대에 들어서자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막걸리 술 도개(도가)에서 매일 거의 정기적으로 마을 점방에
한말 정도 되는 막걸리를 배달해 주기 시작했다.
소득도 어느 정도 늘고 점방에 막걸리가 늘 있으니
댓병(소주 1.8리터용 유리병)이나 주전자만 들고 가면 편리하게 마실 수 있는데
밀농사 지어 (70년대 중반까지 밀농사 지음) 도정해서 누룩을 만들고
술밥을 찌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 참고로 수입밀의 밀가루는 누룩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음.
이래서 술감독도 더 이상 보기 어렵게 되었다.
아마도 세무서에서 보직변경이 되었을 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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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지로 나가 아련히 그리운 풍만이 친구야
그날 니 어머니께서 주신 막걸리 한사발을 먹고 나서
지금까지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는 생애 최초 최고 순간의 알딸딸한 기분을 겪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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