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기

동네 지명 탐구 -- 사중답(寺中沓)

마늘밭고랑 2013. 4. 15.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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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중답(寺中沓)


국어사전에 등재가 안된 용어.

이럴 수가 !


조선시대에 불교가 고초를 겪었다.

그것은 조선의 국시인 유교의 충효이념에 따르면 스님은 부모를 봉양하지 않고 출가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유교는 현생을 말할 뿐이지 죽은 다음의 내생은 취급하지 않으니 ,

백성들에서 왕에 이르기까지 사후 세계가 걱정이 된다면 그 의지할 곳은 당연히 불교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겉으로는 국가시책으로 불교를 탄압하면서 왕실의 원찰을 짓거나 지정하여 불교를 후원하였다.

왕실이 이럴 진대 관리나 백성들이 불교에 의탁하는 것 더 말이 필요없을 것 같다.


한편 정도전이 조선초기에 불교 탄압의 깃발을 든 것은 신흥 중국 명나라가 유교를 숭상함에 따른

것에 약소국인 조선이 중국에 발을 맞추는 것에서 비롯된 것일 거란 짐작이 간다.

그러나 실은 고려시대의 사찰이 가진 막대한 토지를 강탈하여 개국공신에게 지급하기도 하고

토지개혁에 따라 백성들에게 지급함으로서 새 왕조에  대한 민심을 얻기 위한 방편이 더 컸을 것이다.


이렇게 불교의 토지를 몰수하여 불교가 겨우 명맥만 유지하게 만들었지만 후대로 내려올수록 다시

왕실의 후원과 백성들의 보시로 사찰은 많은 토지를 소유하게 된다.


이렇게 사찰이 소유한 토지는 본사급의 사찰의 경우 요즘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면적이었다.


이런 사찰 소유의 농지를 사중답(寺中沓)이라고 부른다.

사중은 寺中으로서 종중(宗中)과 같은 성격의 말인 것으로 보인다.


종중은 동일 조상의 후손들의 자연스런 모임으로서 이루어진 집단이다.

여기에 대표자가 있고 규약이 있으며 주요사항은 종중원의 총회로서 의결하듯이 ,


사중 역시 자연스럽게 형성된 특정 사찰의 구성원인 스님의 집단으로서 대표자인 주지나 방장스님이 있고

그 사찰 (문중)의 규약이 있어 재산관리와 회원인 스님의 자격 조건을 정한 종법이 있었을 것이며

주요사항은 문중 스님의 총회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우리동네 근방에도 교구본사인 대흥사의 사중답이 아직도 있다.


사중답의 경우 해방 이후 토지개혁 때도 종중이 소유한 토지처럼 일정 면적 이상의 소유권을 인정한 것으로 안다. 원래는 대흥사 사중답은 사찰입구인 구림리에서 시작하여 우리동네 앞인  "장구장테"에서  계동 앞인 "날근생이"까지 있었다고 한다.


사찰 입구 쪽의 모랭이(용전)쪽  논에서 끝 쪽인 날근생이 논까지 직선거리로 2km 는 된다.

이들 토지는 저수지가 없어도 개천으로 용수 확보가 용이한 곳에 위치하여 매년 많은 쌀을 생산했을 것으로 짐작을 한다. 또한 주변 5리에 사는 사람들은 아마도 대흥사 사중답을 밟지 않고는 읍내로 갈 수 없을 만큼 대토지였을 것이다. 1800년대인 초의스님 당시의 대흥사 논의 규모가 대단했다는데 면적은 생각이 안 난다 .

이런 대토지를 기반으로 대흥사는 개화기에 사찰내에 사숙(私塾)을 설립하여 지역에서 근대교육에 공헌을 한 것으로 안다. 동네의  90세 친척분도 청소년 시절 이 대흥사 사립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그렇지만 농지개혁 때 국가가 강제로 매각하게 한  법률에 따라 대부분의 토지를 매각하게 했다.

매각대금도 일시불이 아니고 5년(혹시 10년?)간 매년 수확물로서 균등 상황하게 하여

사찰의 경제적 기반인 농지를 헐값에 처분하게 하였다.

그 결과  사찰의 지역에서 수백년간 쌓아온 탄탄한  기반을 꺾어 버렸다.


당시 대통령이 어느 분이시더라 ㅎㅎ


왜 사립학교가 대다수 특정종교인가 의문이 이 대목에서 풀릴 듯 하다.

농지개혁을 하지 않았다면 사찰이 가진 농지를 재정 기반으로 사립학교 설립이나

여러가지 현대적인 복리사업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인데 아쉬운 대목이다.


그것은 농지매각 대금을 일시불로 지급하지 않고 년부 상환을 하게 한 데다 ,

절에서 수행만 한 경영능력이 없는 스님들이 매각대금으로 나온 곡물을 적절히 활용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 사용하여 그 많은 돈이 흐지브지 없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농지개혁은 분명 잘한 것이지만 이렇듯 뒤돌아 보면 아쉬운 점도 있었다.


사중답은 사찰이 소유하고 있는 논이다.

==========

날근생이 : 순 우리말 지명인데  어원을 모른다.


추가

군단위 마다 있는 향교의 농지도 많았을 것인데 , 이 역시 농지개혁을 비껴갈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농지의 향방 역시 궁금하다.매각대금은 제대로 쓰여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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