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곳인 용두리에 거대한 고대의 무덤인 전방후원분이 있다.
이 고분은 원래 발굴되기 전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밀식되어 있고 형태는 길어 누구나 보면 이상한 모양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이를 <말뫼뚱>이라 불렀다.
<뫼뚱>은 묘의 여기 지역 사투리이다.
여기서 <말>은 타고 다니는 말이거나 <마루> 즉 높다는 뜻의 고유어로
<산마루>나 <머리> 즉 높다는 뜻이거나 우두머리 즉 수장의 뜻으로 쓰인 듯 하다.
그래서 말의 무덤이거나 우두머리의 무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승마용 말로 생각했고 나도 그렇게 말의 무덤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바로 너머의 석당리의 작은 개울가에 널쩍한 돌이 하나 돌다리로 놓여 있었는데
돌 위에 말발자국 비슷한 무늬가 있어
이 흔적을 하늘에 말이 내려 온 표시라고 주변 동네 아이들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시기엔가 도굴 시도가 있었고 그래서 문화재 발굴 차원에서 발굴 조사를 한 모양이다.
예전에 여기에도 도굴꾼들이 많이 다녀가 무연고 고분을 많이 도굴하였다고 한다.
하여튼 그 이상한 말뫼뚱은 발굴하고 보니 놀랍게도 일본 왕실이 자기네의 고유한 왕릉양식이라고 주장하는 전방후원분 형태의 특이한 고분으로 판명이 났다.
무덤이 전방후원분은 앞은 각이 지고 뒤는 원형이 특이한 양식이다.
고대사의 비밀이 또 하나 생긴 것이다.
왜 일본왕실의 고대 무덤 양식이 전남 해안지역에서 발견되는 것일까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임나일본부설이 연상되지만 이건 아닐 것이다.
이 말뫼뚱의 발굴에서 어떤 유물이 나온 것인지는 아직 알아보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도에서 보듯이 삼산면은 아주 넓은 편의 평야지대이다.
말뫼뚱이 위치한 곳은 강폭이 100m는 넘을 정도의 너븐내(넓은 시내) 큰 하천의 변이고
예전에는 배도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말뫼뚱에서 하류로 1~2km 떨어진 곳에 조선시대 세곡의 운반을 위한 창고가 있던 해창이 있다,
돌포가 있던 곳
뿐만 아니라 말뫼뚱에서 1km 조금 못 되는 곳에 돌포(石浦)가 있는 바
여기서 돌은 돌배나무의 돌처럼 기능을 못하는 뜻으로 쓰였다.
돌포란 개천이지만 돛단배나 노로 젓는 배가 다닐 수 없는 포구하는 뜻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돌포에도 배가 들어왔다고 한다.
그래서 여기서 돌포는 돌 즉 큰 바위가 있는 포구라는 뜻도 된다.
실제로 돌포는 모(머)봉산의 큰 바위 아래 있었다.
배가 왕래할 정도로 큰 하천이 있고 넓은 평야지대를 배경으로 한다면
지역의 수장급이 살아갈 터전이 있는 셈이다.
삼국시대 이전의 고대 어느 시기에도 삼산면은 농경지대로 많은 인구를 부양할 평야가 있고 교역과 고기잡이 적당한 하천과 바다가 근거리라서 지역의 지배자로서 권력집단의 소재지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 지배자의 무덤이 바로 전방후원분인 말뫼뚱이었을 것이다.
이런 추론이 가능한 이유로 말뫼뚱에서 2km 쯤 거리의 고인돌 집단이 있다.
화산면 연정리의 고인돌 (지석묘) 집단
뿐만 아니라 북일면에도 전방후원분이 있다고 한다.
고대 어느 시기엔가 이 지역의 군소지배자들은 전방후원분을 무덤 형태로 채택했던 모양이다.
이들 지배세력이 백제시대 때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왕실의 구성원이 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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