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625 직전의 현대사로 기억할 만한 사건이 많다 .
그중 하나로 여순반란사건이 있다.
여순반란사건에 대한 위키 백과의 내용을 보면
http://ko.wikipedia.org/wiki/%EC%97%AC%EC%88%98%C2%B7%EC%88%9C%EC%B2%9C_%EC%82%AC%EA%B1%B4
<여수·순천 사건(麗水順天事件, 줄여서 여순 사건)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2개월 뒤인 1948년 10월 19일, 중위 김지회, 상사 지창수를 비롯한 일련의 남로당 계열 장교들과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에 반대한 군부대가 주동하여 2,000여 명의 군인이 전라남도 여수에서 봉기함으로 인해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좌·우익 세력으로부터 전라남도 동부 지역의 많은 민간인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반란군에 의해 경찰 74명, 우익 인사 16명을 포함해 약 150여명의 민간인이 학살됐고, 정부 진압 군경이 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최소 439명의 민간인이 학살되었다.[1]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은 철권 통치와 반공주의 노선을 강화하였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위키백과를 참고하고
그 반란사건의 잔당들의 일부가 해남 두륜산까지 쫒겨왔다고 한다.
여수 순천에서 남해안을 따라 산악으로 두륜산까지 이동이 쉬웠을 것으로 보인다.
토벌에 밀려 해남 대흥사까지 몰려 온 잔당들이
대흥사 경내에서 소를 한마리 잡아 솥에다 삶다가 토벌대인 군경이 들이닥쳐 먹지도 못하고
두륜산의 산자락으로 흩어져 모두가 토벌이 되었다고 한다.
토벌이 된 후 두륜산으로 사람들이 나무를 하러 가면 토벌된 자들의 해골이 여기저기 있었다고 한다.
이 당시에 각 마을에서 젊은 청년들을 선발하여 밤마다 대흥사 계곡의 진입로 안까지
주요 도로에서 50m 정도 간격으로 야방(夜防)을 세웠다고 한다.
평야지 일반도로는 괜찮은데 대흥사 계곡 진입로에서 야방은 무서웠다고 한다.
언제 잔당이 산에서 내려올지 모르는 데다 당시 두륜산에는 호랑이가 살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호랑이가 밤에 울면 마치 톱질하는 소리가 난다고 하셨다.
그 호랑이가 70년대 초까지 두륜산(700m)에서 목격되었다는 말들이 있었다.
60년대 말인지 70년 초인지 우리동네에서 대흥사 계곡 진입로로 운력을 갔다가
도로 주변의 산자락에서 개호랭이(표범?)의 상하지 않은 사체를 한 마리 주워 와
동네사람들이 삶아서 나눠 먹었다.
하여튼 대흥사 계곡이 현대사 비극의 하나인 여수순천반란사건의 토벌의 무대가 된 것이 사실이다.
이런 사실을 젊은 세대는 잘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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