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와 진도까지는 직선거리로 10km가 안 될 것 같다.
진도와 해남의 사이에 울둘목은 명량해전의 전장이었고
그 만큼 진도와 가까운 곳이다 보니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임진왜란에서 잡은 왜군 포로 수용소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금시초문이긴 한데 그만큼 임진왜란과 관련이 있다보니 명량해전에서 불렀다는 강강수월래의 가락이 우리동네에도 전해져 왔다.
어린 시절에 동네 아이들이 추석 무렵이면 모여서 불렀고 어머니세대나 동네 누나들도 강강수월래 놀이를 실제로 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가사는 이렇다.
가~~앙~~강 ~~수~~올~~래 <-- 아주 느리게 시작한다.
(전원 다 같이)강강수올래
(선창)달아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
(후렴 다 같이 ) 강강수올래
이렇게 임의로 가사를 지어 누군가 선창을 하고 모두 따라 부른다.
물론 둥글게 원을 지어 빙빙 돌면서 불렀다.
노래는 점점 빨라지고 빙글빙글 도는 속도도 역시 빨라진다.
갑자기 가사가 하나도 생각이 안 난다.
그 기억 다 어디로 사라졌나 ?
왜군 포로수용소가 있었다는 주장이 있는 바
그 위치는 다음 항공지도로 보면
노란색의 화살표 부근이 임진왜란 왜군 포로수용소가 있던 자리라는 주장이 있다.
우리동네에 <모리샘>이라는 우물이 있다.
모리는 일본 이름이고 모리샘 옆에 모리라는 일본인이 일제시대 때 농업이민을 와서
집을 짓고 살면서 집 앞에 우물을 팠다.
모리샘이 있어 왜군 관련 유적이라고 하지만 틀린 주장이다.
모리샘은 오염되어 사용불가로 매몰되 지금은 지상에 흔적도 없다.
만수동이 왜군 포로수용소 자리라는 주장에 대하여도 내 생각은 다르다.
향토사에 상당한 관심을 가진 내가 보기에도 근방에서 왜군 관련 유적이 없고
촌로들로부터 왜군 관련 이야기도 들은 적도 없다.
해남으로 도망을 온 여순반란 사건의 잔당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아버지로부터 들은 적은 있다.
화살표 지역은 <만수동>이라는 동네 지명으로 부르는 곳이지만 지금은 동네 흔적이 없다.
만수사에서 조금 오른쪽에 독립가옥이 한채 있었지만 헐리고 지금은 흔적도 없다.
화살표 지역은 지금은 농경지이지만 예전에 돌담들이 있었다.
만수동이라는 동네의 흔적으로 확실한 것은 모르지만 전부 폐가가 되고 건너 편의 낙사암이라는 암자만 하나 남았다.
원래 사진의 저수지(양촌제.상거리방죽)가 60년대인가 축조가 되면서 농경지가 수몰되어
동네가 폐가가 된 것이 아닌가 싶지만 난 그 당시 젖먹이 시절이라 그 이상은 모른다.
조금 더 멀리 잡으면 625 사변 때 빨치산이 출몰해 사람들이 떠난 것일 수도 있지만
주변의 동네들이 무사한 것을 보면 원인은 아닌 것 같다.
만수사는 최근에 신설된 사찰이다.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서 연전연승하면서 분명 왜군 포로를 많이 잡았을 것이지만
왜군 포로 수용소라고 밝혀진 곳이 없다보니 위와 같은 주장이 나온 모양인데 더 자세한 고증이 필요할 것 같다.
만수동이 왜군 포로수용소라고 주장하는 쪽에서 만수동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와
구림리에서 일본글자인 가나가 새겨진 석축돌이 발굴된 적이 있다고 하는데
일제시대 때 농업이민을 온 일본인들이 새긴 것은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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