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래는 단군의 아들 이름이라 한다.단군에게 아들이 있고 이 아들의 이름을 농촌에서 농사일하다 가끔 부르는 일이 있었다.
90년대까지는 아마도 들에서 농사일 하다 새참(샛밥)을 먹거나 점심을 먹을 때 입에 음식이 들어가기 전에 치르는 간단한 의식이 있었다.
토지신(사 社)에게 음식 한덩이를 주변으로 던지며 외친다.전국에서는 보통 "고시래" 라고 했다 한다.여기서 고시래는 단군아들 이름이다.
왜 고시래라 하는지 이유는 모르겠다.
이건 식당의 찬상이다.들판에서 새참이나 점심을 먹을 때는 이정도까지 가지수는 많지 않다.이렇게 풀밭에 놓고 먹는다.그런데 우리 동네는 고시래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태이"라고 외쳤다."태이 올해 농사 풍년들게 해주시요"
보통 이렇게 했다.
"태이" 어원은 모른다.
산소에서 성묘 마치고 음식 던지면서도 "태이 하나부지 한마니 올해 집안 걱정 없게 해주시요" 등등 외쳤다.
우리동네는 조선시대부터 있던 양민 동네였다.동네에 625무렵까지 한문서당도 있었다.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으로 지번을 매길 때 행정구역상 지번 시작 동네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태이" 어원이 어디서 온 것인지 더 의문이 생긴다.
조선시대 전국은 다 "고시래" 하는데 왜 남해안 여기 해남은 양민 동네인데도 "고시래" 안했을까?
여기는 전방후원분이 몆기 존재한다. "태이" 는 이들 대형 고분의 주인공들과 관련이 있지는 않은지 추측한다.물론 근거는 없다.고서에서 "태이"를 추적해야 한다.
요즘 해남 여기에서는 마한문화제연구소를 유치하자고 서명받는다.문제는 주류학계에서 해남강진완도를 삼국시대 초기 지명으로 일본서기에 나오는 "친미다래" 라고 붙이려 한다.
한국사에 안 나오는 친미다래.
이 지명을 해남에 붙이는 순간 임나일본부가 해남까지 지배했다는 식민사학이 공식화된다는 점이다.
내 전공 밖이지만 이건 아니다.해남 전방후원분 만든 세력이 일본 열도로 건너가 일본 왕가 세력이 된 것 아닌가?
그럼 혹시 일본에 "태이"라고 외치는 관습이 있을까?
"고시래" 어쩌다가 식민사학까지 왔네.
요즘은 들에서 농사일해도 새참이나 점심을 농가에서 준비하지 않는다. 이와 비슷한 가지수로 면소재지 식당에 전화 한통이면 배달이 된다.
나도 이렇게 배달시킨다.최소 3인분을 주문해야 배달이다.
요즘 배달의민족 같은 배달전문 플래폼은 1인이라도 배달해줄 것 같다.
70년대까지는 들에서 이런 큰 그릇으로 새참이나 점심을 먹었다.공기가 안에 쑥 들어갈 정도로 큰 밥그릇과 국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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