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

해남군 삼산면 용두리 전방 후원분

마늘밭고랑 2024. 11. 11.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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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 쓰이는 전방 후원분이라고 안 썼다.전방 후원분이라고 쓰시지

서쪽에서 바라보는 모습

서쪽 중간에서 보이는 모습

위 사진은 남쪽에서 보이는 모습이다.
전방 前方  즉 앞  모습이 모가 졌다.
묘제에서 남쪽은 보통 앞이다.
특이하게 앞이 모가 졌다.

북쪽은 후원 後圓  즉 원형이다.
이와 같은 전방후원분은 삼국시대 일본왕실의 묘제라고 한다.
이와 관련해 학설이 분분하다.

식민사학자들은 삼국시대 초중기
일본의 지배세력이 전남 일원에 진출해 이런 묘를 남긴 것이나고 한다.

무역을 위한 일본쪽 출장소라는 견해도 있나 보다.
당시 철기도 못 만들던 일본이 백제쪽으로 진출해 와서 지배세력이 되었다?

가능한 이야기인가?

반대로 여기에 살던 세력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지배세력이 되어 여기서 쓰던 전방후원분을 일본에서 퍼뜨린 것은 아닌가?

나는 문외한이지만 전남 일원에 살던 전방 후원분 축조세력이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본다.

그게 자연스럽지 않은가?
문화는 대륙에서 외로운 섬쪽으로 전파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기 유적은 발굴 후 복원된 것으로 안다.후일 여기서 무슨 유물이 나온 것인지  발굴조사보고서를 복ㆍ
싶다.

동쪽 중간에서 보이는 모습이다.

북쪽 즉 뒷면에서 원형으로 보인다.후원이다.

좀 더 멀리서 보면 확실히 원형이다.

유적에서 바라보는 동남쪽이다
사진에 안 찍혔지만 남서쪽에도 좁지만 너른 들판이 있다.

왜 이런 거대한 고분이 여기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지형이다.
삼국시대 초기부터 벼농사를 하였다.벼농사를 위해서는 너른 들과 물길이 필요하다.

앞의 멀리 보이는 산은 표고가 300~700m급 산이다.이 산에서  연중 물이 마르지 않고 흐르며 수량이 풍부하다.

풍부한 물과 너른 들판.

이곳은 벼농사를 지어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다.그렇기에 여기에 백제 초기부터 상당한 규모의 지방세력이 있었을 것이란 생각할  수 있다.

유적에서 남으로  200m 거리에 하천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아마도 평저선인 범선이 닿았을 것이다. 유적의  주인공이 일본이나 영산강 쪽의 세력들과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지금은 양수장으로 쓰인다.


하천 폭이 100m 넘는다.
작은 시냇물이 아니다.

민둥산 시절 산이 깎여 토사가 내려와 하천 바닥에 쌓여 지금은 하천 바닥이 높아져 배가 올라오기 어렵다.

분명 백제 초중기까지는 이곳에도 배가 들어오는 포구였을 것이다.

여기서  하천의 작은 지류로 1km 동쪽에는 돌포라는 지명이 있다.
돌포 즉 배가 들어오지 못하는 포구라는 뜻이다.일제강점기까지는 작은 전마선이 돌포까지도 올라왔다는 말이 있다.

폭  10m 개천에 있는 돌포까지도  배가 올라왔는데 하천폭 100m급   개천에 배가 안 다녔다면 더 이상하다.

이 지점에서 서쪽으로  1km 이내에   바다가 있었고 조선시대 세곡을 해로로 운반하는 해창이 있었다.즉 항구가 있었다.지금은 간척으로  갯벌이 육지가 되었다.

이런 입지 조건이라  분명히 이 묘의 주인공은 일본에서 건너 온  왜의 세력이  아니라 이곳의 벼농사를 기반으로 하며 백제의 지배를 받던 토착세력이었다고 하는 것이 맞다.

원래 이 유적은 말메뚱이라고 불렀다.말은 승마하는 말이 아니고 마리 머리 우두머리였을 것이다.
메뚱은 묘의 여기 사투리이다.

승마하는 말이라면 지역민들이 이 유적을 보호하였을까?

이 유적이 잘 보존된 것임을 알 수 있었던 증거가 있었다.

온통 사방의 산이 나무가 없던 민둥산 시절에도 이 유적 위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많았다.그 건축용  소나무 귀한 시절에도 말이다.왜 주민들이 소나무를 안 베고 땅을 다른 용도로 안 쓰고 잘 보존했는가?

뭔지는 모르지만 1500년   그 이상 지역 주민들도 말메뚱이 신성하다는 것이 전해졌지 않았을까?

이  유적에서 서쪽으로 150m 쯤에  고인돌 상판석처럼 보이는 돌을 개울에 가로질러 놓은 돌다리가 있었다.

그 돌다리에는 말 발굽처럼 보이는 무늬가 음각으로 찍혀 있었다.당시 그동네 아이들은 하늘에서 말이 내려와 찍힌 발자국이라 했다.국민학교 시절 반친구와 함께 내눈으로 직접 본 모습이다.

전방 후원분에  잠든 족장과 이 돌다리 전설은 같이 엮여 지역민들에게 신성함을 전해준 것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