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

문화재 도굴꾼들의 동네가 있었다 ?

마늘밭고랑 2025. 1. 2.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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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공항 참사로 희생된 분들은 애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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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전남 해남이다.
이웃에 강진군이 있고  강진에 고려청자 가마가 많다는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다.

해남에서도 청자를 구웠을까?
그것은 모르겠다.

조선초기까지 청자의 후기단계랄 녹청자를 해남에서 구웠다 한다.

녹청자는 무었인가?

청자가 쇠퇴하면서 백자가  등장하는 중간단계로 구워진 자기던가.
전문가가 아니라서 잘 모른다.

오래 전에 녹청자 실물을 봤다.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 도공들이 일본에서 만든 일본 국보급이라는 투박한 다완처럼 생겼다.

녹청자는  막 다루는 서민용 밥그릇 ?

그런 녹청자 뿐만 아니라  해남에서  분청사기도 구웠는지 오래된 밭에서는 아주 세련된 국화문 분청사기 조각들이 많았다.

지금은  그런 도자기  파편들을 더 이상 보기 어렵겠다.

트랙타가 온밭을 로타리발로 고속회전하면서 산산조각으로  뭉게버리니 그렇다.

이런 풍토답게  일제 강점기 이후 고분 도굴꾼들이 있었다 한다.

80년대 초까지도 우리동네에  모르는 도굴꾼들이 와서 초등학생들에게 무덤들을 물어보고 어느 고분  무덤을  팠다고 한다.

60년대 황무지를 개간할 때  백자계통의 도자기들이 나오곤 했다.

나도 청소년시절 옛 절터에서 국보로 지정된 참외문 상감청자 파편을 주운 적이 있었다.

절터는 조선시대  폐사된 곳이고 내가 주운 때는  모조품 만드는 시절이 아니었으니 진품이었을 것으로 본다.

문화재로 여기지 않던 그런 도자기들 어디로 갔는지 행방을 모른다.

그땐 그냥 감식안이 다 없으니 그냥 사그달 (사기 그릇) 밥그릇  취급 ?


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 우리동네로 이민을 온 일본인들도  황무지 개간하면서 나온 도자기들을 다 챙겼다 한다.

당시 동네 사람들은 시신 곁 부장품이라 불길한 물건이라 여겨 관심 밖이라 챙길 사람들은 동네 일본인들 뿐이었다.

해방 후 동네 일본인들이 귀국하면서 모은 도자기들을 어떻게 하고 갔는지 아무도 행방을 모른다.

인터넷에 기록해두면  어느 때라도 혹시 그런 도자기들이 발견되면 연유를 알게 도움을 주기 위하여 쓴다.

이런 조건을 보면  무연고 고분에 관심을  가지는 도굴꾼들이 있게 마련이다.

특히  어느 동네에 도굴꾼들이 있어 그 동네 안 좋은  소문이 있었다.

돌아가신 큰아버지는 생전에 ㅈㄱㄴ 그동네 몰래 묏(묘) 파러 댕기는 놈들 치고 잘 된 놈 하나도 없다고 흉을 보셨다.

다행히 이제는 더 이상 도굴꾼들이 안 보이긴 한다.